1. 나에 대하여
어릴 때는 걷는 게 그렇게도 싫더니 어느 순간부터 걷기를 즐기고 있다. 아마도 신체의 건강과 마음의 강단을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당시 그 방법으로 티비에서 배운 기체조 5가지(그 중엔 케겔운동도 있다. 그땐 요실금을 예방하는 기체조로 소개되었지만)와 혼자여행(겁도 많고 요령도 못 배워서 혼자서는 꿈도 못 꾸었던 여행)과 걷기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혼자여행의 시작은 부산 범어사의 템플스테이 참가였고, 거기서 만난 참가자 중에 등산 좋아하는 사람에게 걷기동호회를 소개받아 가입한 게 걷기의 시작이었다. 첫 프로그램 참가 2-3일 전에 쿠션 좋고, 좋은 고무밑창이 부착된 트래킹화를 고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꿈꾸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거리가 내겐 너무 길었다. 지친 나를 계속 걷게 해줄 종교도 내겐 없다. 그래서 순례길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런 곳이 있다고 했지, 하고 알고 넘어가는 식이었는데, 요즘 부쩍 관심이 커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무언가를 되찾으려 했던 예전 그때처럼 지금 다시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다리는 그 길을 다 걷기엔 역부족이라 느낀다. 그래서 나 같은 부족함을 가진 사람들의 체험기를 골라 읽는다. 체력이 딸리거나 연세가 많거나.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나는 거기에 스페인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겨우 몇 마디 알아듣는 처지이니 그 책들로 용기를 완충하긴 역시 모자라다.
그저 만일 내가 정말로 순례길에 오르게 된다면 첫 시작점에서 작성한다는 서류에 순례의 목적으로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라고 쓰리라,는 정도만 미리 정해보았다.
2. 이 책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는 70세의 남자로 어떤 기업체의 대표라고 한다. 천주교신자인 부부에게는 뜻깊은 여행이었던 것 같다. 전문 작가가 아니라서 문장과 구조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겠다.
연세가 연세인 만큼 체력의 한계가 있는 순례자들의 경험으로 내가 겪을지 모를 일들을 미리 예상해보자고 고른 책이었는데, 남자인 저자나 그 아내도 거뜬히 길을 마친 걸 보면(중간에 150여 km 정도는 버스를 탔지만) 그들이 나보다 더 강하거나, 아니면 저자의 말대로 으레 걷다 보면 그 고행에 몸이 적응하는 것이거나. 후자이길 바라지만, 왠지 전자일 것도 같고..
내가 이렇게 자신을 못 갖는 건 이 순례자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서 중간중간 고급식당과 호텔숙박 등을 적절히 섞어가며 했다는 것. 나도 그렇게 돈 써가며 할 수 있을까가 의문이고, 만일 돈을 쓴다면 코스 중간에 2-3일 정도씩 머무르면서 지역 관광을 하거나 축구직관 하고 다시 코스를 이어가는 식으로 하고 싶긴 하다. 보통 5주가 가장 무난하다는 일정에 나는 6주도 좋고, 7주도 좋다는 식으로 말이지.ㅋ
순례길과 상관없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거슬리는 것은 저자의 무례함이었다. 사실 무척 인정 많고 좋은 분인 것 같은데, 길에서 만났던 순례자들을 언급할 때 습관화된 오만이 드러났다. 흔히 돈이든, 사회적 지위든 '있는 사람'이 타인을 볼 때의 '한국식' 시선은 몸에 깊이 배게 마련이어서 의식적으로 고칠 수 없고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저자는 특히 살집 있는 분들에 대해서 거침없이 "뚱땡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같이 찍은 사진도 책에 실어놓고, 본문과 사진설명에 "뚱땡이 아줌마"라고 하질 않나, 고부지간이라는 다른 서양여자들에게도 "뚱땡이 여자"라고 하질 않나...
또 길에서나 식당에서 만난 노년의 순례꾼들에게는 대뜸 "몇 살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쪽에서는 "나이는 없고 열정만 있다"는 식으로(정확한 대답을 까먹;;) 답했다고 한다.
'쯧쯧, 한국에서 하던 버릇. 꼰대짓 쩐다.'
그런 에피소드가 적힌 부분에선 절로 마음이 찌푸려졌다.
사실 남의 나이를 묻는 것은 외국에선 큰 실례라고 하지만 토종한국인인 나도 나이나 개인신상을 대뜸 물어대는 사람들이 거북하다. 하나 대답하면 곧바로 다른 걸 또 물어온다. 2개, 3개 답하다 보면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인상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개인신상정보를 물어주는 게 상대에 대한 선의를 표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너에게 이만큼이나 관심을 주고 있단다. 고맙지?" 뭐 이쯤 되는 모양이다.
아니면 서로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걸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상대를 알기 위해 묻는다.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누군가를 알고 싶으면 내 얘기를 먼저 하면 된다. 간단하다.
내 말을 듣고, 내가 편하게 느껴지면 상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자기 얘기를 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상대를 알아가는 것이 맞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00 사는데, 요즘 날씨가 더워지니까 동네공원에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아, 그래요. 저는 00 사는데 공원이 좀 멀어서 아쉬워요."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에 부쩍 관심이 가요."
"잘 걸으시나봐요? 저는 좀더 속도감을 즐기고 싶어서 자전거를 타요. 주말마다 나가죠."
"아! 우도에서 속도감을 만끽했던 기억이 나네요. 4륜바이크를 신나게 몰았었죠."
"저는 우도에서도 자전거를 빌렸었죠."
벌써 사는 지역과 취미와 즐기는 운동법과 여행경험까지 알게 되었다. 굳이 "어디 살아요? 취미가 뭐예요? 체력관리 어떻게 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이.
함부로 묻는 사람들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이유는 내가 '묻는 말엔 대답을 한다'주의자였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거북한 질문에도 답을 해주자니 스트레스가 컸던 것. 이제는 다 대답하지는 않는다.
그런 직설적이고 단순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은행이나 관청의 서류에 적는 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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